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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교단의 분열과 발전
이 글은 平川彰 著/李浩根 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卷 (서울: 민족사, 1989), pp.131-154에서 빌려온 것이다. 부파교단의 분열과 그 전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부파불교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편집자> 부파불교의 성격 부파불교(部派佛敎 Nikaya Buddhism) <부파를 니카야(Nikaya)라고 부르는 것은 의정의 <남해귀기내법전>(대정54, p.205上)의 音寫에 나타나며, 또한 Mahavyutpatti 및 티베트譯, <이부종륜론> 등에 의해 알 수 있다. 단 팔리불교에서는 니카야를 부파의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란 원시교단이 상좌?대중의 두 부파로 분열한 이후의 전통적인 교단의 불교를 말한다. 당시는 그 이외에도 불교도가 존재했을 것이다. 예컨대 재가신자는 교단 Samgha 밖에 있었지만, 그들이 어떠한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불타가 탄생한 곳?성도한 곳?초전법륜한 곳?반열반한 곳 등이 일찍부터 ‘4대 靈場’으로서 존숭되고 불타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순례하는 성지로서 각광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초기불교시대부터 신자들의 종교활동도 활발했던 것이다. 또한 불멸 직후, ‘八王分骨’에 의해서 중인도의 각지에 불탑 st?pa이 세워졌는데, 그 때 불타의 유해를 화장하고 사리(Sarira 신체)를 분배하여 탑을 세운 것은 모두 재가신자였다. 그 불탑들은 비구들이 거주하는 정사 vihara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四大路 catumahapatha에 여래의 탑을 造立하라(DN. Vol. II, p.142)’고 설해짐으로써, 탑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 건립되었다. 이 탑들은 신자들이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신앙하며 護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육왕경> 등에 의하면 아쇼카왕은 8왕분골의 탑을 개방하여 불타의 사리를 인도전역으로 확산시켜 다수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왕이 다수의 불탑을 세운 것은 당시 불교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 요구에 응하여 왕은 불탑을 건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불탑을 기반으로 해서 어떠한 신앙이나 교의가 유행하고 있었는지는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가 없다. 후세의 대승불교의 발전의 원류를 생각하는 경우에는 원시불교시대부터 불탑교단에서 배양되고 있던 ‘불타신앙?불덕찬앙’ 운동을 더듬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信者團의 신앙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불교교단의 正系는 원시교단을 계승하는 부파교단이었다. 즉 불타의 직제자인 대가섭이나 아난 등에 의해 수지된 불교는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계승되어 부파교단으로 발전한 것이다(사리불과 목련은 불타가 입멸하기 이전에 죽었다). 따라서 부파교단의 불교는 ‘제자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이며 남에게 가르치는 입장의 불교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적인 불교였기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聲聞乘 Sravakayana)’이라고 불렸다. 성문이란 불타의 말씀을 들은 사람, 즉 ‘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재가자도 ‘성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는 ‘성문’은 출가의 제자만으로 한정된 듯하다. 다음으로 부파불교교리의 특징은 출가주의라는 점이다. 출가하여 비구가 되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한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행형태를 조직하고 있다. 다음으로 부파불교는 은둔적인 승원불교이다. 그들은 승원 깊숙이 숨어서 금욕생활을 하고 학문과 수행에 전념한다. 따라서 街頭의 불교는 아니다. 타인의 구제보다는 먼저 자기의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이다. 그 때문에 대승교도로부터 ‘소승 Hinayana’이라고 불리고 천시되었다. 소승이란 좁은 교리, 천한 교리라는 뜻이다. 이처럼 그들이 생활대책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승원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출가교단은 국왕이나 왕비 혹은 대상인 등의 귀의와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사원에 희사했다. 카니시카 Kaniska왕이 설일체유부에 귀의한 것은 유명한데, 그 이전에도 북인도의 大藩侯 Mahaksatrapa인 쿠수루카 Kusuruka나 번후 ksatrapa인 파티카 Patika 등이 교단에 토지를 보시한 사실을 적고 있는 비문이 보인다. 또한 남인도에서는 안드라왕조의 왕족이나 왕비들이 불교교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들이 승단에 토지를 보시한 사실을 적고 있는 비문도 많다. 불탑이나 四方僧伽에 토지나 굴원을 보시한 사실이 적혀 있는 비문이 B.C. 2세기 경부터 A.D. 5세기 경까지 다수 제작되었는데, 그것들을 통해 당시 20개 이상의 부파교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승단에는 국왕들의 지원이 있었지만, 또한 상인계급도 불교승단을 지원한 듯하다. 상인은 隊商을 조직하여 커다란 밀림을 지나고 사막을 가로질러 먼 곳에 있는 도시와 교역을 하거나 혹은 배를 타고 큰 바다로 나가 다른 나라와 통상을 했다. 이러한 통로에는 수많은 곤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한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력과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다. 이성적인 종교인 불교가 그들의 취향과 합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타국으로 가서 이민족이나 다른 계급과 자유로이 교제해야만 했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를 엄격히 지키는 바라문의 종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농민은 바라문교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상인계급 중에는 부파교단 뿐만이 아니라 대승교단에 귀의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 중 富商이나 지도자를 ‘長者 Sresthin’라고 한다. 장자로서는 불타에게 귀의한 給孤獨장자(Sudatta 須達)나 우그라 Ugra장자 등이 유명한데, 원시불교시대부터 불교신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장자는 많다. 대승경전에서도 장자가 불타의 설법의 對告衆으로서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부파교단도 지원했을 것이다. 이처럼 국왕이나 장자들의 원조에 의해 승단은 생활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했으며, 이로써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이것이 아비달마 Abhidharma(법의 연구)불교이다. 제2결집과 제3결집 불멸 100년 경에 원시교단에 ‘10사’의 싸움이 일어나 700명의 장로가 바이샬리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는 것은 이미 서술한 바 있다. 팔리율장의 ‘700건도’에는 700명의 장로가 10사를 계율의 입장에서 검토하고, 이것을 ‘律結集 Vinayasamgiti’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서술되어 있는데, 10사를 검토한 후에 경장과 율장을 결집한 사실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한역 諸律의 ‘700건도’에서도 거의 이와 마찬가지다. 표제로는 ‘결집율장’?‘集法毘尼’ 등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서술내용에는 10사 이외에 경장과 율장을 재결집했다는 사실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세일론의 <도사>와 <대사>에는 10사의 논쟁 후에 700명의 장로가 레바타를 상수로 하여 ‘법결집 Dhamma-Samgaha’을 행하여 8개월에 걸쳐 완성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제2결집 Dutiya Samgaha’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도사>에 의하면 장로들에 의해 추방된 비구들도 1만 명의 지지세력을 얻어 ‘법결집’을 행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것은 ‘대결집 Maha-Samgiti’이라고 불렸는데, 그들은 잘못된 교법을 결집했다. 즉 그들은 근본결집(제1결집)을 파괴하고 별도의 결집을 하였다. 어떤 개소에 결집되어 있던 경을 다른 개소로 옮기고 5部에 있어서 義와 法을 파괴했으며, 異門說이나 了義未了義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실된 경과 율의 일부분을 버리고 거짓 경과 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결집의 비구들도 경율을 재결집한 셈이 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상좌부의 결집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 대결집을 행한 비구들(Mahasamgitika 大結集派)이 ‘大衆部 Mahasamghika’라고 불리는 것이다(島史에서 ‘대결집파’라고 하는 것을 大史에서는 ‘대중부’라고 한다). ‘대중’이란 사람의 수가 많다는 뜻이다. 즉 세일론傳에 의하면 근본분열 후에 상좌?대중이 각각 결집을 했다고 한다. 북전의 <이부종륜론>에서는 결집이 있었다는 것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불멸 100년 경인 아쇼카왕의 치세에 “四衆이 함께 大天의 5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나뉘어 두 부파가 생겼는데, 대중부와 상좌부가 그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대천의 5사’에 관해 사중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두 부파로 분열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대천의 5사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대천의 5사’란 大天 Mahadeva이라는 고승이 제창한 다섯 가지 주장이라는 뜻이다. 즉 ⑴아라한이라도 다른 것, 예컨대 天魔 등의 유혹에 빠지면 不淨이 흘러 나옴을 면치 못함(余所誘). ⑵아라한이라도 무지, 즉 不染汚無知는 아직 존재함(無知). ⑶아라한에게도 의문이나 의혹은 남아 있음(猶予유여). ⑷남으로 하여금 悟入게 함(他令入). ⑸道는 소리에 의해 생겨남(道因聲故起) 등을 말한다. 아라한의 깨달음을 낮게 보는 설이다. 이것은 북전 有部의 <이부종륜론>이나 <대비바사론> 등에 전해지고 있는데, 남전상좌부의 <논사>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부파불교시대의 논쟁제목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四衆이 논의했다”고 할 때의 사중이란 龍象衆 Gnas-brtan-klu?邊鄙衆(Sar-phyogs-pa, 東方衆)?多聞衆 Man-du-thos-pa?大德衆이었다고 한다(단 티베트역 <이부종륜론>에서는 ‘3중’, <부집이론>에서는 ‘4중’으로 되어 있다). 여하튼 ‘700결집(10사의 집회)’이 있었다는 것은 대중부계통의 마하승기율과 상좌부계통의 諸律이 함께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단 마하승기율에서는 ‘10사’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후에 경장의 재결집이 이루어진 것은 세일론傳의 <도사> 등에서만 설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막연히 ‘제2결집’이라고 부른다. 이 때 경장과 율장의 재결집이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700명이 모여 결집을 했다는 점에서는 여러 자료에 공통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2결집’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보아도 좋다. 다음으로 ‘제3결집’은 세일론傳의 <도사>?<대사>?<선견율> 등의 설로서, 세일론상좌부만의 전승이다. 세일론傳에서는 불멸 100년 경의 제2결집은 칼라아소카 Kalasoka왕의 시대에 있었으며, 다음으로 불멸 218년에 즉위한 아쇼카왕의 시대에 목갈리풋타 팃사를 중심으로 하여 ‘제3결집 Tatiya-samgaha’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 성립한 것이 <論事 Kathavatthu>였다고 한다. 이처럼 칼라아소카와 아쇼카를 구분하기 때문에 제2와 제3이라는 두 가지 결집이 설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북전의 <이부종륜론>에서는 아쇼카왕을 불멸 100여 년 경에 출세했다고 보기 때문에 제3결집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세일론傳에서 제3결집 때 성립되었다고 하는 <논사>는 세일론상좌부만이 전하는 논서이다. 다른 부파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제3결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좌부라는 1부파내에서의 결집이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도사> 등에 의하면 아쇼카왕이 불교교단을 지원해 줌으로써 교단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그래서 ‘안이한 생활을 바라고 출가하는 자(theyyasa?vasaka 賊住比丘)’가 많아지고 상가의 계율이나 수행이 어지러워졌다. 그 때문에 상가에 싸움이 일어나 월례행사인 포살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목갈리풋타 팃사가 아쇼카왕의 지지를 받아 상가를 숙정했다. 즉 불교를 ‘분별설 vibhajjavada’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상가로부터 추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논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목갈리풋타는 1,000명의 아라한을 선발하여 ‘법의 결집’을 행하고 9개월에 걸쳐 수료했다고 하며, 이것이 제3결집이라고 한다. 세일론상좌부는 불교를 ‘분별설’이라고 이해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단정(一向記)하지 않는 것이 분별설이다. 진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싸움이 일어난다. 현실은 그러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섞여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별(분별)해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분별설’의 입장이다. 세일론상좌부는 불교를 이러한 분별설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 때문에 세일론상좌부를 ‘분별설부 Vibhajjavadin’라고도 한다. 이상의 전승은 상좌부의 내부에서 어느 시대인가 제3결집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제3결집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논사>의 내용은 여러 부파의 교리를 전제로 하여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부파분열의 완성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형태의 <논사>가 성립된 것은 아쇼카왕시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 100년 이상 늦게 성립되었으며, 학자들에 의하면 B.C. 2세기 후반에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논사>가 제3결집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면 제3결집은 B.C. 2세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말분열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을 ‘근본분열’이라고 하는 데 비해, 상좌?대중의 각각이 다시 분열을 되풀이한 것을 ‘지말분열’이라고 한다. 상좌부와 대중부 중에서 먼저 내부분열을 일으킨 것은 대중부라고 한다. 대중부계는 사람의 수도 많았지만 특히 자유사상가들이 많아 내부의 통제가 제대로 안되었을 것이다.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제2의 100년 중엽에 대중부에서 3부가 갈라져 나왔다. 一說部?說出世部??胤部(계윤부)이다. 마찬가지로 제2의 100년 중엽에 대중부에서 多聞部가 갈라져 나왔다. 다음으로 역시 제2의 100년 중엽에 說假部가 갈라져 나왔다. 그 다음에 제2의 100년이 끝날 무렵, 대천이 남인도의 제다山 Caitya에서 ‘5사’를 제창했다. 이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3부로 나뉘었다. 즉 制多山部?西山住部?北山住部의 3부라고 한다. 이상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대중부에서는 4회의 분열이 있었고 8부가 갈라져 나왔기 때문에 本末을 합해서 9부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불멸 100년부터 200년까지의 사이에 있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상좌부의 지말분열에 대해서 <이부종륜론>은 이것이 200년 이후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상좌부는 분파 후 100년간은 일미화합하고 있었지만, 200년이 지나서부터, 즉 제3의 100년에 접어들면서 분열이 일어났다. 우선 상좌부는 조그마한 싸움에 의해 설일체유부(說因部)와 본상좌부(雪山部)로 갈라졌다. 다음으로 설일체유부에서 犢子部가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독자부에서 法上部?賢?部(현주부)?正量部?密林山住部의 4부가 갈라져 나왔다. 그 다음 제4차 분파에서 설일체유부로부터 化地部가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 화지부에서 法藏部가 나왔다. 법장부는 스스로 목련의 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다. 다음으로 제6차 분파에서 설일체유부로부터 飮光部(善歲部라고도 함)가 갈라져 나왔다. 이상의 분파는 300년 중엽까지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다. 다음의 제7차 분파는 제4의 100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즉 설일체유부로부터 經量部(說轉部라고도 함)가 갈라져 나왔다. 경량부는 論보다 經을 중시하여 제1결집 때 경장을 송출한 아난을 스승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상좌부는 7회의 분열에 의해 11부로 나뉘었다. 대중부는 본말을 합해 9부이기 때문에 상좌부와 합해서 20부가 된다. 그래서 근본의 2부를 제하고 ‘18부의 분열’이라고 한다. 대중부의 경우는 4회의 분파를 하면서도 근본의 대중부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상좌부의 경우는 그 점이 분명하지 않다. 최초로 분열한 유부와 설산부(本上座部) 중 어느 한 쪽을 근본상좌부라고 보아야 하는데, 설산부가 본상좌부로 불린다는 점에서는 이것이 근본상좌부인 듯하다. 그러나 설산부는 지역적으로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으며, 부파로서의 세력도 약했던 듯하다. 더구나 상좌부의 다른 지말분열은 모두 유부로부터 파생한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이부종륜론>에는 의문이 있다. <이부종륜론 Samayabhedopa- racana-cakra>의 저자는 世友 Vasumitra인데, 그는 유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유부가 상좌부의 근본임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어떠한 조작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상좌부의 지말분열은 불멸 201년 경부터 300년 경 사이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불멸을 아쇼카왕의 즉위로부터 116년 이전이라고 한다면, 불멸은 B.C. 386년(宇井박사의 설, 中村박사의 설은 383년 경)이 되며, 대중부의 지말분열은 B.C. 3세기 중엽이고, 상좌부의 지말분열은 B.C. 2세기부터 B.C. 1세기 사이에 있었던 셈이다. 또한 경량부도 B.C. 1세기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단 세일론傳으 218년설과 대조하면 이보다 약 100년 이르게 되며, 불타의 입멸은 B.C. 484년(야코비=金創박사의 설) 경이 된다. 이렇게 볼 때 대중부의 지말분열은 아쇼카왕 이전에 이미 완료되었으며, 상좌부의 분열은 아쇼카왕의 시대로부터 그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있었던 셈이 된다. <이부종륜론>에 의거하여 당시의 분파를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생략> 부파교단의 발전 아쇼카왕시대에 인도전역으로 퍼진 불교는 그 후 순조롭게 발전했다. 상좌?대중으로 분열된 초기의 부파교단에 있어서, 특히 중인도에는 대중부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10사’를 주장한 비구들이 바이샬리의 비구(밧지족 출신 Vajjiputtaka)이며, 그들이 중심이 되어 대중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0사에 반대한 비구는 서방의 비구와 아반티?남로의 비구들이었다. 필시 상좌부의 중심은 중인도보다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세일론에 법을 전한 마힌다 Mahinda는 아쇼카왕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어머니는 웃제니 Ujjeni(남로에 인접해 있음)의 베디사 Vedisa 출신이며, 마힌다는 여기서 旅裝을 갖추고 인도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세일론으로 간 듯하다. 팔리어가 기르나르 비문과 유사하다는 점도 상좌부가 서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 유부의 전승에서 보더라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대비바사론> 99에는 아쇼카왕의 시대에 ‘대천의 5사’문제를 논할 때 상좌들은 대천의 패거리에 비해 숫자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패했고, 그래서 그들은 鷄園(아쇼카왕이 세운 파탈리푸트라의 승원)을 버리고 캐시미르 Kasmira로 이주했다고 설해지고 있다. <아육왕경> 등을 보더라도 우파굽타는 마투라를 개교한 사람이며, 末田地는 캐시미르를 개교한 사람이다. 이러한 전승들은 후년 캐시미르가 유부 교단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과도 합치한다. 유부가 물자가 풍부한 캐시미르에 교단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정교하고 치밀한 아비달마교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이다. 상좌부계가 서방?북방으로 발전한 데 비해, 대중부는 중인도로부터 남방으로 발전한 듯하다. 대중부계의 비문은 남인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말하면 대중부는 상좌부에 비해 세력이 약했던 것같다. 상좌부계의 부파에는 상좌부?유부?정량부 등 이름이 알려진 부파가 많지만, 대중부계에는 대중부를 제외하고는 이름이 알려진 부파가 적다. 상좌부계의 논서는 현재도 다수가 전해지고 있지만, 대중부계의 문헌은 매우 적다. 대중부계인 설출세부가 전한 불전인 <마하바스투 Mahavastu 大事> 외에 두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부파교단의 지말분열은 B.C. 2세기 경이 절정기였다고 생각되는데, 분열의 이유 등은 분명치 않다. 또한 ‘18부’가 각각 어느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는가 하는 것도 분명치가 않다. 여하튼 B.C. 1세기 무렵에는 이미 대승불교가 흥기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부파교단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대승교단과 더불어 부파교단도 막강해졌으며,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부파교단은 대승불교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대승불교가 대중부에서 발전했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대중부가 대승불교에 흡수되어 버렸던 것은 아니다. 대승교단이 출현한 뒤에도 오랫 동안 교단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義淨(635-713)의 시대에도 대중부는 유력한 4교단의 하나로서 번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도부파불교의 동향을 밝히고 있는 자료는 드물다. 중국에서 인도로 여행한 구법승의 기록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선 法顯은 A.D. 399년(隆安 3년)에 중국을 출발하여 인도에 갔는데, 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무렵의 인도에는 소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을 학습하는 절, 그리고 대승과 소승을 함께 학습하는 절 등 3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북인도의 羅夷國에는 3000명의 승려가 있어서 대승과 소승을 겸학하고 있었으며, 또한 跋那國에는 3,000명 가량의 승려가 모두 소승을 학습하고 있었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법현전>은 1권의 작은 책이기 때문에 그 기술은 상세하지 않지만, 그 중에는 소승불교가 유행하고 있던 나라가 9개국, 대승불교가 유행하고 있던 나라가 3개국, 그리고 대승과 소승을 겸학하고 있던 나라가 3개국이라고 적혀 있다. 그 외에 대소승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유행하고 있던 나라가 20여 개국이나 열거되어 있다. 이것이 5세기 초의 인도불교의 상황이다. 그러나 부파명을 완전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다음으로 629년에 중국을 출발하여 인도로 여행한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에는 7세기의 인도불교의 상황이 상세하게 보고되어 있다. <서역기>에는 불교의 학파명을 밝히고 있는 곳이 99개소 가량 된다. 그 중에서 소승을 배우는 곳이 60개소, 대승을 배우는 곳이 24개소, 그리고 대승과 소승을 겸학하는 곳이 15개소이다. 비율로 보면 소승불교 쪽이 훨씬 많다. 소승불교 60개소 중에서 설일체유부가 14개소, 정량부가 19개소, 상좌부가 2개소, 대중부가 3개소, 설출세부가 1개소, 대승상좌부가 5개소, 그리고 단지 소승불교라고 적혀 있는 것이 16개소이다. 이렇게 보더라도 7세기 전반에는 소승교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음이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정량부와 유뷰가 강력했다. 대중부계는 대중부 3개소, 설출세부 1개소가 있을 뿐이다. 현장은 대승상좌부를 5개소 열거하고 있지만, 그것은 세일론의 불교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상좌부이긴 하지만, 대승적인 사상도 수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세일론불교는 마힌다 이래의 전통적인 상좌부의 불교를 신봉하는 大寺派 Mahavihara-vasin와 대승계인 方廣派 Vetulyaka의 교의를 수용하여 자유연구를 표방한 無畏山寺派 Abhayagiri-vihara-vasin의 대립시기였다. 410년 경에 세일론을 여행한 법현은 무외산사에 5천 명, 支提山寺에 2천 명, 大寺에 3천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무외산사의 우세를 밝히고 있다. 법현은 여기서 화지부의 율장이나 장아함?잡아함?雜藏 등을 입수했다. 현장의 시대에는 세일론에 전란이 있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大寺는 대승을 배척하고 소승을 익히며, 무외산사는 2승을 겸학하고 三藏을 弘演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때문에 무외산사와 같이 기본적으로는 상좌부의 교학에 의거하면서도 대승을 수용하고 있는 불교를 ‘대승상좌부’라고 불렀을 것이다. 현장의 시대에는 인도불교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간다라의 불교를 가리켜 “불탑의 대부분이 ‘황무비괴(荒蕪?壞)’해 있으며, 가람은 1천여 개소 있지만 모두 최잔황폐(?殘荒廢)(꺾이어 손상을 입어 황폐해져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임)하고 무만소조(蕪漫蕭條)(넓은 대지에 잡초만 무성하고 쓸쓸하였다는 표현)하다”고 말하고 있다. “天祀가 많고 異道가 매우 많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것은 힌두교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부파불교의 초기에는 설일체유부의 세력이 강했지만, 점차 정량부의 세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예컨대 사르나트의 비문에 의하면 녹야원의 정사는 쿠샤나시대에는 유부의 所領이었지만, 4세기 경에는 정랴부의 소령으로 바뀌었다. 정량부가 점차 강대해진 것은 정량부가 아트만(pudgala 補特伽羅?人我)을 인정하며 인도의 전통설과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671년에 인도에 간 의정(635-713)은 주로 날란다 Nalanda寺에 체류하면서 연구를 했는데, 그는 <남해기귀내법전> 권1에서 대승과 소승의 구별은 분명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양자 모두 똑같이 250계를 지키며 四諦를 학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보살을 예배하고 대승경전을 읽는 자는 대승으로 불리고 이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소승으로 불린다”고 그는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이라고 하더라도 중관과 유가의 2파뿐이며, ‘大小雜行’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는 소승불교의 입장에 서서 인도의 불교상황을 밝히고 있다. 당시는 대중?상좌?근본유부?정량의 근본4부가 주였다고 하는데, 마가다는 4부를 通習하지만 유부의 세력이 강했다. “서인도의 羅茶?信度지방은 정량부가 가장 많지만 나머지 3부도 약간은 있다. 남인도는 상좌부가 압도적이지만 나머지 부도 약간은 있다. 동인도는 4부가 섞여 있다. 세일론은 모두 상좌로서 대중은 배척되고 있다. 南海諸州의 10여 개국은 한결같이 근본유부지만 정량부도 약간은 있다. 末羅遊(말레이반도?)에만 약간의 대승이 있다.” 의정은 이상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보더라도 유부?정량?상좌의 3부가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정은 ‘근본설일체유부 M?lasarvastivadin’는 언급하고 있지만, 설일체유부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 50년 전의 현장은 설일체유부만을 언급하고 근본유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근본유부라는 명칭은 주로 Bhavya나 Taranatha, <번역명의대집> 등 테베트의 전승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부와 근본유부의 상위가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중인도의 유부교단이 캐시미르의 유부교단에 대항하여 근본유부를 자칭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부의 付法相承은 대가섭?아난?상나화수?우파굽타로 이어진다. 그리고 상나화수와 우파굽타는 모두 마투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우파굽타가 아쇼카왕에 의해 영입된 것이다. 중인도의 유부는 필시 이 계통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 상나화수의 동문으로 末田地가 있으며, 그가 캐시미르를 개교한 것이다. 다라서 말전지는 유부의 부법상승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이육왕전>에는 대가섭?아난?상나화수?우파굽타?提地迦의 순으로 부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권 40에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아육왕전> 등은 근본유부의 상승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육왕경> 권7에는 대가섭?아난?말전지?사나바사?우파굽타의 순으로 정법의 부촉이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말전지를 상승의 계보에 삽입하는 것은 캐시미르유부의 주장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중인도의 유부는 이 상승설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래서 캐시미르유부의 세력이 쇠퇴한 시대에 근본유부를 자칭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하튼 근본유부는 중인도에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 세일론상좌부 세일론은 옛날에는 탐바판니(Tambapanni 銅葉洲)라고도 불리고 또한 랑카섬(Lankadipa 楞伽島), 師子洲 Simhara라고도 불렸으며, 인도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현재의 세일론의 국명은 스리랑카인데, 이것은 슈리-랑카 Sri Lanka <번영이 있는 랑카섬>에서 유래한다). 인구가 9백여 만 명이고 9州와 4國이 모여 이루어진 작은 섬인데, 여기에 전승된 불교가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등에 유행하고 있는 ‘남방불교’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세일론의 불교는 마힌다와 4명의 비구 및 추종자들이 섬으로 건너옴으로써 시작된다. 당시의 세일론왕은 데와남피야 팃사 Devanampiya Tissa였다. 그는 마힌다 일행을 위해 王都 아누라다푸라 Anuradhapura에 사원을 건립했다. 이것이 후세에 大寺 Mahavihara로 발전하고, 이른바 大寺派 Mahaviharavasin의 근거지가 되었다. 또한 마힌다가 도착한 미힌다레에는 支提山寺 Cetiyapabbatavihara가 세워졌다. 게다가 마힌다의 누이동생인 상가밋타 Samghamitta尼 등이 보리수를 갖고 섬으로 건너와 비구니교단의 기초도 마련하였다. 그 후 세일론인으로서 출가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국왕의 귀의에 힘입어 사원이나 불탑도 잇따라 건립되어 세일론불교는 순조롭게 발전했다. 그 다음 주목해야 할 것은 B.C. 1세기에 건립된 無畏山寺 Abhayagiri-vihara의 출현이다. 이로써 세일론불교가 두 파로 나뉘고, 그 후 오랫 동안 항쟁하게 되었다. 당시의 세일론왕인 밧타가마니 아바야 Vattagamani-Abhaya는 B.C. 44년 경에 즉위했는데, 타미르인 때문에 한 때는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15년 후에 왕위를 되찾고 12년 간(B.C. 29-B.C. 17년) 통치했다. 그 대 왕은 아바야기리寺를 건립하여 마하팃사 Mahatissa장로에게 헌납했다. 이것은 B.C. 29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마하팃사 장로는 大寺에서 배척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많은 제자와 함께 대사를 탈출하여, 아바야기리寺에 거주했다. 이로써 세일론불교는 두 파로 분열한 것이다. 또한 밧타가마니왕의 시대에 종래 구전에 의해 전해지고 있던 성전이 書寫되었다고 한다. 이 작업에는 500명의 비구가 참여했다. 필시 각 개인이 기억하고 있던 聖敎를 서로 확인하여 문자로 옮겼을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성전의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팔리성전의 내용이 일단 확정되었다고 보여진다. 이 사업은 대사파의 비구들이 주도한 것이며, 왕의 지원 없이 이루어졌다. 같은 왕의 시대에 인도의 밧지풋타카派 (Vajjiputtaka 犢子部)의 담마루치 Dhammaruci장로가 제자들과 함께 세일론으로 건너와 아바야기리寺로 모셔졌다. 그 때문에 아바야기리派는 다마루찌派(法喜部)라고도 불린다. 그 후에도 아바야기리寺의 비구들은 인도의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도입하고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에 대해 大寺派는 상좌부불교의 분별설부 Vibhajjavada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하리카 팃사 Voharika Tissa왕(269-291)의 시대에는 인도에서 거너온 대승계의 베툴라바다 (Vetullavada 방광파)의 무리가 아바야기리寺에 잠입했는데, 곧 왕에 의해 좇겨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바야기리寺는 방광파의 무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일부는 아바야기리寺를 떠나 닥키나기리 (Dakkhinagiri 南山)에서 다른 파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祇陀林寺 Jetavanavihara派로 불리기도 하는 사가리야 Sagariya派이다. 이것은 고타바야 Gotahabhaya왕(309-322)시대의 일이다. 이로써 세일론불교는 3파로 나뉜 것이다. 왕은 무외산사에 살고 있던 60명의 방광비구를 붙잡아 그들을 파문하고 인도로 좇아 버렸다고 한다. 도한 2代 아래인 마하세나 Mahasena왕(334-361)은 大寺를 탄압했기 때문에 그 후 대사파는 쇠퇴하고 무외산사의 왕금시대가 오랫 동안 지속되었으며, 시리 메가반나 Siri Meghavanna왕(362-409)의 시대에 칼링가로부터 佛齒가 도래하여 무외산사에 안치되었다. 5세기에 접어들어 마하나마 Mahanama(409-431)왕의 시대에 대주석가인 붓다고사 Buddhaghosa가 건너와 마하비하라에 거주하면서 팔리삼장을 주석하고 많은 저작을 남겼다. <小王統史 Culavamsa> XXXVII, 215-246)에 의하면 붓다고사는 중인도의 菩提道場 부근의 바라문 출신이라고 하며, 버마(미얀마)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버마의 타톤 Thaton 출신이며 불멸 943년 마하나마왕의 치하에 세일론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붓다고사는 남인도 출신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여하튼 붓다고사는 타국에서 세일론으로 와 마하비하라에 거주하면서 大寺의 전승에 의거하여 명저 <淸淨道論 Visuddhimagga>을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전승되고 있던 古주석을 활용하여 경?율?논 삼장에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뿐만 아니라 싱하리즈語(세일론語)로 씌어 있던 주석을 팔리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상좌부의 교학은 이 붓다고사의 해석이 현대에 있어서도 표준이 되고 있다. 붓다고사는 일을 마친 후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에도 大寺와 無畏山寺는 오랫 동안 서로 대립했는데, 역대의 왕들은 무외산사를 지지한 사람이 많았던 듯하다. 그러나 그에 대해 대사는 고난을 잘 극복하고 청정한 상좌부의 교학과 계율을 유지했던 것이다. 8세기 전반에는 세일론에 대승불교, 특히 밀교가 성행하여 金剛智나 不空이 來島했다고 한다. 그런데 11세기 초엽 마힌다 5세의 시대에 시바교도인 남인도의 촐라 Chola人들의 침입으로 王都와 精舍가 폐허화하였다. 그러나 비자야바후 Vijayabahu 1세(1059-113)는 반세기 동안에 걸쳐 세일론을 점령하고 있던 올라인들을 격퇴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버마로부터 장로를 초청하여 불교를 부흥시켰다. 도한 12세기에는 파락카마바후 Parakkamabahu 1세(1153-1186)가 나와 대사, 무외산사, 기타림사 등의 승려 중 퇴폐한 자를 환속시키고 교단을 정화했다. 그리고 大寺의 불교가 올바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대숙정을 단행하여 正純한 상좌부의 불교를 흥륭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숙정에 의해 무외산사의 불교는 완전히 부정되고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리하여 1,000여 년에 걸친 대사와 무외산사의 싸움은 끝나고 대사의 정통상좌부불교로 통합된 것이다. 아바야기리는 황폐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촐라인 · 포르투갈인 · 네덜란드인 · 영국인 등이 앞을 다투어 침공해 왔다. 18세기에 킷티시리 라자싱하 Kittisiri Rajasimha왕은 10인의 大德을 타이국에서 초청하여 불교의 흥륭을 도모했다. 그 후에도 타이 및 버마로부터 보강공작이 행해졌다. 오늘날의 스리랑카불교는 그것이 이입된 장소에 따라 샴派, 케라니派, 아마라푸라派, 라만니야派 등으로 불리고 있다. Updated: September 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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